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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CE: The Wave Becomes a Face》

물결은 얼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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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하스는 2025년 [6월 21일]부터 [7월 22일]까지

이경희(Kyung hee Lee)의 개인전 《THE FACE: The Wave Becomes a Face》_ 물결은 얼굴이 된다. 를 개최합니다.

본 전시는 수많은 점이 선으로 연결되고,

그 선들이 방향성을 얻으며 형상으로 응결되는 과정을 통해

‘존재의 탄생’이라는 찰나를 포착합니다.

 

작가 이경희는 조형의 언어를 통해 존재를 탐구해왔습니다.

아주 미세한 입자와 파동, 그 끊임없는 반복과 진동은 결국 하나의 얼굴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이 얼굴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흐름 속에서 잠시 드러나는 존재의 흔적일 뿐입니다.

 

이 전시는 그러한 움직임의 물결 속에서 태어나는 수많은 얼굴,

곧 우리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파동으로부터 태어난 얼굴입니다

전시기간

2025년 6월 21일 [토] - 2025년 7월 22일 [화] 

◼장소: Gallery HAS_갤러리하스
◼전시문의: 010 7471 8037

[갤러리 하스 블로그] [blog.naver.com]

점과 선, 실과 바늘, 미세한 입자와 파동의 반복은

이경희 작가의 화폭 위에서 하나의 얼굴이자 존재의 시가 된다.

세포처럼 작고 섬세한 요소들이 서로 연결되고,

우주의 숨결처럼 진동하는 리듬 속에서,

그녀는 생명과 감정, 기억과 치유, 그리고 존재의 빛나는 흔적을 수놓는다.

그림은 고정된 형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주되는 정동(affect)의 흐름이며,

시적 언어 처럼 은유되고 중첩되며,

관객과의 만남 속에서 비로소 ‘존재의 얼굴’로 드러난다.

이경희 (b.1968~) KYUNG HEE LEE

 

 

이경희 작가는 1991년 경희대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한 후 도불,

1995년 프랑스 베르사유보좌를 졸업하였으며,

1998년 파리 8대학 조형예술학과 학사 졸업하였습니다.

이 작가는 1994년 프랑스 베르사유 갤러리 DES CARRES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현재까지 10회의 개인전을 진행했습니다.

단체활동으로는 1994년 파리 갤러리 ART PRSENTA에서 첫 그룹전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유럽 및 미국 등 다양한 국가에서 매해 수차례의 그룹 전시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경희 작가는 1991년부터 2019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학업 및 작업을 하였으며

현재는 한국에서 작업 활동 중입니다.

작가노트 

 

 

나의 청춘이 걸어 다녔던 파리의 거리,

지금도 기억 속을 흐르는 도시의 바람과 향기,

무심코 떠오르는 풍경이 한순간 마음에 피었다가, 허무하게 흩어진다.

 

지나간 시간들은 안쓰럽지만, 따뜻하다.

돌아보면, 내 청춘의 모든 시간들은 가슴에 그려진 하나의 꽃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눈을 감으면 꿈속이고, 꿈속에서는 표현이 자유롭다.

 

그 꿈은 과거로, 때로는 미래로 나를 데려간다.

우연과 인연으로 마주한 이야기들이, 실과 바늘이 되어 하얀 길 위에서 시작된다.

 

그 길 위에서 선율처럼 반복되는 점과 선, 색의 층위들은

때로는 도취되고, 때로는 길을 잃지만

점점 더 또렷한 형상으로 살아남는다.

 

나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곧 꿈을 따라 떠나는 여행이다.

그리고 그 여행의 끝에서,

물결은 하나의 얼굴이 된다.

 

 

이경희의 작품세계_존재의 표정 혹은 존재의 떨림 _ 이선이(시인, 경희대 교수)

 

 

 

1. 시

 

여기 낮은 목소리로 시적 감성을 자극하는 그림들이 있다.

허블 망원경보다 일곱 배나 더 먼 우주를 볼 수 있다는 제임스 웹 망원경이 전송한 우주의 속살일까?

전자현미경으로 본 생물체의 세포단위에서 볼 수 있는 생명의 표정일까?

하늘과 바다, 빛과 물, 별과 꽃이 만나는 공간에서 무수한 생명의 파동이 일렁이며

때로 반짝이고 때로 춤추며 존재의 내밀한 그리움을 불러낸다.

대해(大海)의 물결 위에서 우주의 여행객인 별들과 지상의 정원사인 꽃들이 만나 거부할 수 없는

큰 호흡에 빨려 들어가듯 하나로 버무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그림들은 풍경이 아니라 내면이고 주제가 아니라

정동(Affect)이며 서사가 아니라 시라고 불러야 마땅하리라.

그녀는 지금 화폭 위에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2. ‘작다’와 ‘잇다’

 

이경희의 회화 이미지는 ‘작다’와 ‘잇다’ 사이를 오가며 존재의 표정을 포착해내고 있다.

화폭 속 무수한 별과 꽃, 물방울과 둥근 세포 이미지들은 모두 우주의 가장 작은 존재를 위한 기도로

화폭에 동참하고 있으며, 이들 이미지를 감싸면서 반복적으로 출렁이는 크고 작은 선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려고

화폭에 굳건히 발을 디디고 서서 세계를 잇는 끈을 붙들고 있다.

작은 꽃들과 별들은 우주의 숨결 속에서 반짝이는 생명의 빛을 반추해낸다면,

이 존재를 감싸는 부드러운 선들은 시간의 물결 속에서 소멸과 생성을 무한 반복하는 존재의 리듬을 불러낸다.

한없이 작은 것들의 무한한 파동과 그 연쇄를 통해 먼지처럼 극소한 존재는 우주처럼 팽창한다.

그렇다면 저 고요한 화폭의 심연에서는 존재의 빅뱅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3. 바늘과 실_존재를 꿰매는 은유적 행위

 

작가의 손에는 바늘과 실이 들려있다.

마치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복구의 작업대에 바늘과 실을 올려놓았듯이.

작가는 보잘것없이 살아가는 존재의 가난을 꿰매기 위해 뾰족한 바늘의 귀를 열고

부드러운 실을 꽂아 막막한 세상에 따뜻한 존재의 거처를 마련해준다.

한 땀 한 땀 꿰매는 바느질을 통해 저 무수한 꽃들은 여리고도 앳된 꽃빛을 틔우고,

물결들은 유장한 흐름을 만들며 쉼 없이 출렁이고,

생명체를 이루는 작은 막 속에는 생명의 에너지가 생동하는 활기를 머금는다.

이처럼 바늘과 실은 화폭 위에 생기를 살려내는 생명의 은유(Metaphor)가 되고,

바느질은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떨림을 포착하는 예술적 행위가 된다.

바늘을 쥔 작가의 손은 인류의 오래된 작업 방식인 바느질을 통해

우주의 시간과 티끌의 시간을 가만히 잇대어 꿰매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기에 화폭 앞에서 우리는 먼지 같은 존재들에게 저토록 따스한 거처를 마련해 주려고

무수한 시간의 파편을 꿰매고 있는 바늘의 인내를 떠올리게 된다.

 

 

 

4. 최소성:Minimum과 최대성:Maximum

 

살아있는 생명을 구성하는 기본단위는 세포이다.

세포(Cell)라는 이름은 기독교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기거하던

작은 독방을 부르던 명칭인 ‘cell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수도사들이 기거하던 좁고 작은 방과 그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수도원의 풍경을 떠올려 보라.

마치 지구 위의 한 점처럼 초소한의 존재로 살아갔던 수도사들,

그러나 그들은 좁디좁은 그 방에서 우주와 같은 신을 믿으며 최대한의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이경희의 작품에서 마주하는 저 점들로부터 생물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를 떠올리게 된다면,

우리의 마음속에도 수도원의 독방에 앉아 우주와 교감하는

간절한 한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리라.

최소와 최대는 이렇게 만나고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자.

상상의 재미를 아는 이는 캔버스 속을 유유히 흘러 다니는 저 둥근 형상에서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세포의 발전소라고 불리는 미토콘드리아는 물질적 생기의 원형적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흥미롭게도 이 말은 끈(Mitos)과 낱알(Chondros)이 결합된 단어이다.

끈이 연결을 의미한다면 낱알은 고립을 의미한다.

선과 점으로 이어진 둥근 원형의 형상들은 이어지고 끊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가장 작은 존재로 가장 큰 존재를 암시한다.

 

 

 

5. The Face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évinas)는 얼굴(The Face)이란 이미지나 대상이 아니라 윤리적 요청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윤리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얼굴을 마주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얼굴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생물학적인 신체의 일부분으로서 우리가 갖고 있는 얼굴을 뜻하지 않는다.

진정한 얼굴이란 그 안에 감추어진 무언가가 드러남(Manifestation)을 말하며,

이러한 드러남을 통해 우리는 소유나 이해를 넘어서서,

나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The Other)를 만날 수 있게 된다.

그 무한한 존중의 대상인 타자의 얼굴을 이경희의 작품에서 발견하는

기쁨과 슬픔이 우리에게 주어진 지복(至福)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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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시간

화요일 ~ 토요일: 10:00 - 18:00

일요일 , 월요일: 휴관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달맞이길 30. LCT 포디움동 3051

48099 30, Dalmaji-gil, Haeundae-gu, Busan, Republic of Korea

©2024 by  GALLERY H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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